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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둘레길/영남권 둘레길

2천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죽령 옛길, 그리고 희방사 옛길

by 강가딩 2013. 6. 5.


걷기에 입문한 이후 늘 가볼 곳 1순위로 올려놓았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던 죽령 옛길을 걷고 왔다.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덤으로 희방사옛길도 맛보고 왔다

 

▲ 코스: 죽령휴게소~(죽령옛길)~소백산역~(희방사 옛길)~희방사 삼거리

▲ 거리/시간: 4,4km, 1시간 50분

▲ 언제/누구랑: 인도행 대충방 행님들과


 



소백산역에서의 즐거운 유희

뒤에 보니 제주 신혼여행 가서 산굼부리에서 했던 포즈다

 

 오늘 걷기는 죽령휴게소에 시작한다.

 

죽령은 해발 696m다

 

죽령 옛길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길로 ,

옛날 어느 도승이 이곳을 지나가다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길가에 꽂은 것이 살아나 ‘죽령(竹嶺)’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일명 ‘대재(臺在)’라고도 부른다.

 

소백산 자락길 3구간이 지나간다.

 

죽령주막

 

역사적으로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는데,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죽령은 문경새재와 달리 산길이다

 

죽령은 고개가 험준하고 마을과 떨어져 있어 나그네의 괴나리봇짐과 보부상들의 짐을 노리던 산적 떼가 들끌었다고 한다.

동시에,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 길의 선비, 공무 수행 중의 관원들, 그리고 보부상 등

많은 사람들이 죽령을 넘나 들었기 때문에 이들 나그네를 위한 주막과 마방들이 죽 늘어서 있었던,

사시사철 번잡한 고갯길이기도 했다(퍼온 글).

 

2.1km, 1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하지만 우리는 죽령에서 희방사역으로 내리막길을 걸었기 때문에 훨씬 여유가 있었다.

 

이깔나무 숲

 

다자구 할머니의 전설처럼,

죽령 근처의 풍기지방에는 욕심 때문에 산삼을 얻을 기회를 놓친 한 농부의 이야기도 전해온다.


옛날 풍기지방에 장날이 되면 산에서 내려와 장터에 갔다가 해가 지면 산으로 돌아가곤 하던 초립동자가 있었다.

장터 근처 도솔봉에 있다는 오래 된 산삼이 사람으로 변한 것임을 눈치 챈 한 농부가

초립동자를 따라가 말을 붙이고 장터에서 음식을 대접했다.


돌아오는 길에 초립동자는 보답으로 농부에게 가장 큰 산삼은 뽑지 마라는 당부와 함께

산 깊숙한 곳에 있는 산삼밭을 알려줬다.

산삼밭에 간 농부는 욕심에 눈이 멀어 동자와 한 약속을 잊고 가장 큰 산삼부터 뽑아들었다.

그런데 산삼은 뽑히지 않고 삼의 뇌두(싹과 뿌리를 연결하는 부분)만 뽑히면서

그날 장터에서 먹은 음식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그 넓었던 산삼밭은 순식간에 부추밭과 옻나무밭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한다.


 

 

도깨비 부처

 

과수원길

 

 

 

마침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 돌아갈래~~~

 

소백산역에서 연결되는 희방사 옛길도 걸었다

 

희방사 삼거리까지 걸었다

 

마을을 지나자 흙길이 시작되었다

 

 

 

주초에 비가 와서 계곡에 수량이 풍부했다

 

희방사 제 3주차장에서 오전 도보를 종료하였다

 

오늘 걸은 길(네이버) 나들이 앱

 

트레킹이 끝난 후 영주 선비촌 저자거리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바로 요기서 소고기 국밥으로

 

경상도식 소고기 국밥은 육개장이었으며,

깔끔했고 먹을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