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테마 걷기/짜투리(골목·돌담)

창경궁 산책

by 강가딩 2018. 12. 16.



36년만이란다

옆지기가 말하길.


뮤지컬 팬텀을 보기에 앞서,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창경원에 갔다


옆지기랑 함께 갔을 때가 1982년 봄이었다

그 때 데이트였다고 할 수 있었나....





운 좋게 해설시간과 딱 맞았다



옆지기와 둘만을 위한 황제의 해설이었다

해설사님의 덕분에 창경원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이하의 글은 창경궁 홈피에서 가져온 것이다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이다

홍화(弘化)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뚯이란다




창경궁에 대한 나의 기억은 밤벚꽃 미팅이다

그 때는 창경원 시절이었고,

창경궁 복원 작업으로 동물원, 식물원, 그리고 일본 꽃의 상징인 벚나무를 다 치웠단다




창경궁은 본래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었단다

그리고 창덕궁과 함께 동쪽에 있는 대궐, 즉 동궐이라고 했단다

일제 강점기에 궐내각사 등을 부수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1980년대 초부터 복원 중이란다





옥천교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돌들은 품계석이라 하는데,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었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한다




천장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고




지붕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등이 액막이로 세워져 있다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으나,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빈전(殯殿)으로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문정전의 앞 마당이 바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아픔의 역사적 현장이다.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국왕의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




여기까지가 외전이다


왕이 몇시에 일어난 줄 아는가?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3번 경연 등 신하들과 학문을 논한한다

밤 12시경에 잠자리에 든단다

격무다. 쉴 시간이 없다

1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했어야 했는데





이 문, 빈양문은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왕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통하기 때문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빈양(賓陽)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밝음인 양은 국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다.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1694(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된다.


 

 


가장 못난 왕,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집복헌(集福軒)1735(영조 11) 1월에 사도세자, 1790(정조 14)6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춘헌(迎春軒)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다.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 하였다.

보수중이었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 세웠던 풍기의 받침대이다.

1770(영조 46)에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 창덕궁 통제문 안에 설치되었다가 해방 전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198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해시계

해시계는 해가 없을 때는 작동이 불가능하므로 주로 물시계를 사용하고 보조적으로 사용했단다




 



춘당지는 본래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었고, 최근까지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라마식 탑으로 중국 명나라(1470)때 만들어졌다는 글귀가 탑신에 들어 있어

복원 작업 중 해체되지 않고 존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짧았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담에는 어디를 가볼까?

데이트를 자주 하러 갔던 경희대 문과대를 한번 가볼까?